우산을 만지작거리며 / 허수경
비가 온다.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시집을 펼쳤다.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 허수경 / 문학과지성사>
한 번씩 펼쳐보는 그의 시는 마음을 울린다. 오늘처럼 하루 종일 비가 오는 날은 그 어떤 텍스트도 필요치 않다. 누군가의 시 한 편이면 충분하다. 그것이 허수경 시인이라면 더더욱.
책방에서 처음 이 시집을 펼쳤을 때 살아서는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그가 내 마음속으로 걸어들어 왔다. 그 뒤 책꽂이에 꽂히지 않고 늘 자리 한곳을 차지하고 있다. 가을과 겨울 사이에 있는 11월의 오늘, 우산에 걸려있는 빗물을 털어내며 그를 생각한다.
우산을 만지작거리며
-허수경-
우산을 만지작거리며 아무 데도 가지 않았다 삶과 연애 중이라고 생각하라고 심리상담사는 말했다 우산을 만지작거리며 나가볼까 생각한다 생계를 위해서라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먹는 것보다 자는 것이 중요하다고 심리상담사는 말했다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더라면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가끔 심리상담사를 죽이는 꿈을 꾸다가 그가 내 얼굴을 달고 있는 장면에서 꼭 잠을 깬다 내 얼굴을 향하여 내가 칼을 들이밀고 있었으므로
그때 그 어느날 심리상담사에게 죽은 허 씨에게, 라고 시작되는 편지를 보여주지 말아야 했다 얼어 죽은 국회에게, 라는 편지도 맞아 죽은 은행에게, 우주로 납치된 악몽에게, 달에 있는 나의 거대한 저택에게, 라고 시작되는 편지도 어떤 편지도, 아니 내가 끊임없이 편지를 쓰는 식물이라고 고백하지 않는 편이 나았다
나는 동물의 말을 하는 식물입니다
나는 희망의 말을 하는 신입니다
나는 유곽의 말을 하는 관공서입니다
나는 시계의 말을 하는 시간입니다
나는 개가 꾸는 꿈입니다
등등의 고백도 하지 않는 편이 나았다
하지만 고백하고 말았다(물론 나는 그걸 강제된 고백이라고 부르고 싶기는 하다) 나라는 나쁜 인간을 방어할 무기가 나에게는 필요하다 나를 공허하게 버려줄 무기가 너에게는 필요하다
우산을 만지작거리며 오늘 오후에 있는 그와의 약속을 생각한다 불투명한 유리가 끼워진 대기실도 대기실에 붙여둔 자살 위험이 있는 사람들의 일곱 가지 특징에 대해서도 내가 읽어보면 그들은 다 살지 못해서 안달한 사람인데 심리상담사의 꼬임 혹은 그의 인턴이 건네주던 하얀 줄이 박힌 푸른 사탕 때문에 나처럼 고백을 한 사람들일 뿐인데
우산을 만지작거리며
나는 웃는다 울 일이 없어서 심란한 아이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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